웹프로그래머의 자존심은 오만원이였다.

아니, 나의 자존심이 오만원이였다.

겨울이 막 끝나고 화창한 봄날.
2009년 4월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의 연속이였다.
3년만에 나는 다시 사무실을 열었다.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집에서 일을 하니 스스로 나태해 지는 걸 막지 못했고 의뢰인에게도 전문가라는 신뢰를 주지 못했다.
10년동안 이 일을 하면서 두 번 사무실을 닫고 세번째 다시 오픈이다.

정리가 덜되 어수선한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 왔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상담을 하고 싶단다.
얘기를 들어보니 웹프로그램 영역은 아니였다.
얼핏 들어도 다섯명 정도의 개발자와 수억원의 개발비가 필요한 프로그램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서울에 있는 선배와 친구들에게 얘기를 꺼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프로젝트였다.
3일 뒤에 다시 그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 내가 튕기는거라 생각하는거 같았다.
나는 웹프로그래머고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적어도 서울에 큰 회사에 알아보라고 달래듯 보냈다.

“이 프로그램은 사장님께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 내게 불가능을 물어봤다.
내 자존심을 건드린 첫번째 말이였다.
“제가 가능할 수 있도록 충분한 개발비와 충분한 시간을 주면 가능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찾아 왔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내 말이 사실임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온 듯 하다.
규모를 축소하면 만들어 줄 수 있냐고 한다.
“제 생각에는 경기도나 서울쪽 업체에 문의하시는게 좋을거 같아요.”
나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일을 맡았다간 한동안 몸과 마음이 고생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다음 날 음료수 한상자를 들고 다시 찾아 왔다.
처음 얘기했던 프로그램은 한 사람이 한두달 작업해서 될게 아니란 걸 재차 확인 하고 온 듯 하다.
웹프로그램으로 비슷하게라도 기능을 구현해 줄 수 없냐고 한다.
이정도까지 오다보니 이 사람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됐다.
마침 AJAX와 웹표준 입문을 막 끝냈던 터라 새로운 방식이라면 비슷하게 구현은 가능할거 같았다.
그러나 처음 이 사람이 만들어 달라고 했던 프로그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안하겠다고 하면 매일 사무실로 찾아올 기세였다.

5주 예상하고 견적을 내서 계약을 했는데 작업을 하다보니 8주가 넘게 걸렸다.
어느정도 비슷하게 기능은 돌아간다.
의뢰인도 만족해 한다. (처음엔…)
세상에 없던 프로그램이였다.
나도 처음 해보는 작업이였고 몇날 며칠을 밤새고 몸은 녹초가 됐다.

처음 수정건이 들어 왔다.
당연히 처음에 몇 건은 수정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그러다 아예 기능 자체를 바꿔 달란다.
다시 몇 주를 작업해 바꿔줬다.
그러고 다시 수정건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수정건에 대해선 추가비용이 들거라 했다.

결국 4달동안 나는 이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했다.
계약 관계에선 일하는 사람보다 돈을 쥔 사람이 유리한 고지에 서있기 마련이다.
잔금을 받기 위해 몇가지 수정을 더 해주고 더 해주며 나는 지쳐갔다.
잔금을 포기할 생각으로 더이상 못하겠다고 하니 잔금을 치룬다.
그러면서 또 수정 한두개 넌지시 말한다.
프로그램 오류라면 당연 디버깅을 해줘야 하지만 나는 단순히 이 사람의 변덕에 놀아나고 있었다.

5만원짜리 내 자존심

어찌 됐든 고생해서 만들어 놓고보니 그럴싸하다.
내가 만들어 놓고도 근사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땐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며 반신반의 했었다.
드디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대대적인 광고도 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는 5만원짜리 돈 봉투하나를 들고 왔다.
수정건이 많아서 미안하다며 갖고 왔다.
그리고 하나만 더 수정해 달라고 한다.
지난번 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바꿔 달라고 한다.
이 사람은 말 한마디 던져놓고 가지만 나는 밤새야 한다는 걸 모른다.
이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건낸 말에 나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프로그램 제작한 것은 포트폴리오에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작업한 프로그램 내 포트폴리오에 올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하니, 이 프로그램의 아이디어와 기획은 자기 머리에서 모두 나온 것이고 나는 한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4달을 넘게 그렇게 고생해서 작업한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거 같다.
화가 났다.
당신 뿐만 아니라 내게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아이디어 갖고 온다. 나는 의뢰한대로 만들어 주고 내가 작업한 부분에 대해서는 내 경력에 포함시킨다고 말하니 선뜻 받아들이질 못한다.
결국엔 확인서를 써달란다.
어찌됐든 프로젝트 마무리되고 했으니 지난 일은 잊고 정리하려고 했던 마음이 싹 가신다.
웹프로그래머가 사람들 인식에 저평가 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내 노동에 대한 권리마저도 인정 못받는 줄은 몰랐다.
10년만에 처음이다.

사무실 옮겨온지 이제 1년도 안됐는데 이 사람이 텃세라도 부리면 낭패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입소문이 무섭다는 걸 이미 수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확인서를 건내주고 그 사람이 나가고 한동안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지만 나는 결국 5만원이 든 돈봉투를 찢어버리지 못했다.
마음만 그랬다.